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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커튼의 흔들림

Taste in Images

가끔 아무 생각없이 에디워드 호퍼(Edward Hopper-호퍼라고 쓰고 하퍼라고 읽자)의 그림들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특히 어두운 뉴욕을 배경으로 홀로 떨어진 사람들의 모습에 끌리게 되는데 타인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어두운 상처의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차분한 감정을 느끼고 거기에 위안까지 얻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둠이 감싸고 있는 아파트 외벽 사이로 나온 세 개의 창문 틈으로 빨간(혹은 핑크 계열)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보인다. 이 작품은 세 개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트립틱(triptych)과도 같다. 왼쪽 창문에 창백하게 나부끼는 (블루톤의) 하얀 커튼과 오른쪽 창문 틈으로 비쳐나오는 따뜻한 불빛은 그 가운데 놓인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대신하고 있는듯 하다. 오른쪽으로만 제한된 따뜻한 불빛. 그 반면 두 창문을 장악한 멜랑코리한 노란 벽, 그리고 왼쪽에 나온 커튼은 마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듯 세상 밖으로 간절한 손을 흔든다.  


(최소 2층으로 보이는) 아파트 안의 풍경을 보는 사람은 분명 이 여자를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여자를 바라보는 관찰자는 여자가 살고 있는 층수보다 높아 보인다. 혹은, 에드워드 호퍼가 자주 그랬듯, 뉴욕의 도심에서 빌딩 사이를 질주하는 'El train'의 창문 밖으로 그녀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는 그녀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있다. 우리는 순수한 관찰자가 아니라 관음하는 '피핑탐peeping tom'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이 그림에서, 혹은 일반적으로 그림에서 그러한 침범의 시선을 문제 삼는 일은 흔하지 않다.  


반면에 뉴욕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아른 스벤손(Arne Svenson)은 뉴욕 고급 아파트 거주자들의 일상을 엿보는 일련의 작업들인 'Neighbors' 시리즈를 공개하면서 논란과 비난에 휩쌓였다. 회화와 달리 사실성이나 현실이 걸러지거나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에서는 사람들은 침범과 위협을 보고 더욱 방어적으로 된다.  


현실에선 사진가가 그렇게 공격받는 와중에도 똑같은 사진가가 영화에 놓이면 또 상황이 달라진다. 제프(제임스 스튜어트)가 잘 생겨서 일까, 주인공이라서 일까,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의 이 '변태아저씨'는 교묘하게 비난으로부터 빠져나간다. 오히려 우리는 그에게 이입돼 그와 함께 관음을 즐기게 된다.  


관음은 주로 섹슈얼리티의 영역 안에서 다뤄지지만, 우리의 관음이 항상 섹슈얼한 것은 아니고 섹슈얼한 관음만 즐거운(?) 것도 아니다. 남을 관찰한다는 것은, 그것도 그 사람의 가장 사적인 사생활을 목격(침범)하고 싶은 욕망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보고싶은 간절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혼자 있을 때 나는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까. 그리고 남이 보여주려고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발견하는 그 사람과의 동질감, 혹은 연결고리는 그 사람이 면전에서 건낸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에드워드 호퍼로 돌아가자. 이 그림을 보고선 나는, 내가 극장에 혼자 있을 때 내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길 바랬다. 한동안 극장에 혼자 가기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인정하고 나면 적응은 빨라지게 되어있다. 내가 혼자인 것을 또 우리 모두가 누구나 결국엔 혼자인 것을 인정하고 나면 혼자라도 머뭇거릴 이유는 적어진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의 화려한 삶 속에 둘러쌓인 뉴요커들도 외롭다고 느낄 때가 많다고 하는데 나의 삶이라고, 또 그들의 삶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세상과 격리된 집안에 들어가 한쪽엔 불빛을 켜고 따뜻한 평온을 느껴도 다른 한쪽엔 파아란 커튼을 내걸어 간절하고도 조용한 외침을 끊임없이 펄럭거려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