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밀착인화지,

아직은 너를 보내기 어렵다

포토닷

<매그넘 컨택트시트> 전시회를 다녀와서

사진에 관련해서 디지털 시대가 밀어내거나 바꾸어버린 기술과 형식은 수없이 많은데, 밀착인화지, 혹은 컨택트시트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인화지에 인화해서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컨택트시트는 이제 라이트룸(Lightroom)의 기능으로라도 살아남았다. 다만, 라이트룸의 ‘contact sheet’ 기능으로 굳이 모아놓은 이미지의 나열을 보는 마음이, 네거티브에서 처음 포지티브로 돌아선 이미지를 처음 손에 들던 감흥과 같을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밀착인화지의 가치는 감흥이라는 감정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유명한 사진가들의 밀착인화지에 관련되어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 여럿 있다. 개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는 매번 촬영에서 돌아와서 처음으로 얻는 최초의 밀착인화지를 오랫동안 직접 인화하지 않았다. 밀착인화지를 보는 순간 현장에서 느꼈던 감흥이 사라진다며 밀착인화지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리고 윌리엄 이글스톤(William Eggleston)의 밀착인화지를 보면 모든 사진이 단 한 장씩만 촬영된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서 여러 컷을 촬영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은 손님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 대신에 난장판이 된 부엌을 공개하는 것과 같다면서 자신의 밀착인화지를 공개하지 않았다.   

위의 각각의 이야기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밀착인화지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위노그랜드는 밀착인화지에서 사진을 선정하는 과정에 자신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이유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길 만큼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단 한 장을 얻기 위해 한 통의 필름, 혹은 몇 기가의 메모리카드도 꽉 채우는 여느 사진가와 달리 단 한 장씩만 촬영했던 이글스톤의 놀라운 촬영 습관을 드러내고 증명하는 것도 그의 밀착인화지이다. 그리고 자신의 밀착인화지를 감추고자 노력했던 카르티에-브레송은 정작 다른 사진가들의 사진에 대해서는 밀착인화지를 보기 전에는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제자들의 밀착인화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으로도 유명할 만큼 밀착인화지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만큼 가치를 두고 있었다.    

                

자신의 밀착인화지는 가급적 숨겨둔 채 정작 다른 이들의 밀착인화지에는 관심이 많았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태도는 다소 이중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사진가들에게 밀착인화지가 얼마나 예민한 자료인지는 사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밀착인화지는 종종 화가의 스케치나 영화의 러쉬(rush) 필름에 비교되곤 하는데, 어떤 점에서는 소설가의 버려진 원고와 가장 유사한 듯하다. 소설가에게 출간한 책 말고 버린 원고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이는 상당히 무례하게 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버린 원고는 행여 누가 볼까 갈가리 찢어버리는 소설가라도 다른 작가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탈고했는지, 그 속사정에 대한 호기심을 억제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다행이라면, 버렸던 원고를 모아서 스스로 공개한 소설가들은 거의 없는 반면, 자신의 밀착인화지를 스스로 공개해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사진가들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번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매그넘 컨택트시트> 전시회는 그렇게 민감한 밀착인화지를 대중들과 선뜻 공유하고자 할 만큼 ‘관대했던’ 유명 사진가들의 밀착인화지를 볼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기회이다. 매그넘은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 소속 사진가들의 밀착인화지들을 모아, 국제사진센터(ICP)의 큐레이터 크리스틴 루벤(Kristen Rubben)의 편집을 거쳐 2011년에 <Magnum Contact Sheets>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고 같은 해 뉴욕 국제사진센터에서의 전시회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돌며 동명의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책에 실렸던 매그넘 포토스 소속의 69명의 사진가들과 밀착인화지 139점 중에, 이번에 한미사진미술관에서는 65명의 사진가들와 70여점의 밀착인화지가 공개되고 있다. 이는 적은 수가 아닌데, 전시회에서 사진을 하나하나 살피고 부지런히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하루도 결코 많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진집과 마찬가지로 시간 순서대로 전시된 사진들은 1933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을 시작으로 2010년 짐 골드버그(Jim Goldberg)에서 마무리된다. 각 작가별로 한 두 장의 밀착인화지와 밀착인화지에서 선별된 사진들, 그리고 촬영 당시 상황이나 사진에 관한 설명이 포함된 텍스트가 같이 전시되어있다. 또한 사진이 실렸던 당시의 매체와 책이나, 하다못해 사진가들 사이에 오간 엽서가 전시된 경우도 있어서 역사적인 자료를 목격하고 있다는 신비로운 경외감마저 들기도 한다.      

 

매그넘 사진가들의 사진들을 보다보니 앙리 카르티에-브레송부터 로버트 카파(Robert Capa), 요제프 쿠델카(Josef Koudelka), 엘리어트 어윗(Elliott Erwit), 수잔 메이셀라스 (Susan Meiselas), 스티브 맥커리(Steven McCurry), 그리고 알렉 소스(Alec Soth)까지, 역시 매그넘에는 유명한 사진가들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매그넘의 사진가들 중에는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유명한 사진가들이 많은데, 사진가들의 이름은 모른다고 해도 대중들이 시대의 아이콘처럼 기억하는 사진들까지 더하면 <매그넘 컨택트시트>는 일반인들에게도 그렇게 낯선 전시회만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시회에서의 도슨트는 네거티브 필름 속지와 슬라이드 필름까지 들고 다니며 사진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상세한 설명을 더하였다.

다만, 매그넘의 사진들에 하루 종일 둘러 싸여 있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의문 하나는 전시회를 나오는 순간까지도 끝내 떨구어 낼 수 없었다. 이번 전시회의 매그넘의 사진들 중에는 비틀즈(The Beatles), 체 게바라(Che Guevara),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등 사진가는 물론 사진 자체보다 유명한 인물들의 사진들이 포함되어있다. 이런 인물들의 사진은 지금 매그넘의 명성을 만들어주는 데에도 분명 한 몫을 했으며, 이번과 같은 전시회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는 큰 매개체이기도 하다. 마틴 루터 킹이 196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 귀국해서 수많은 환영인파를 맞이했던 현장을 촬영했던 사진의 밀착인화지를 보면서 나조차 그 감흥을 쉽게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피사체의 유명세가 사진의 의미와 매그넘의 명성에까지 종종 과도한 가치를 부여한 적을 없었을까하는 의문도 동시에 들었다.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유명한 인물들의 사진들 때문에 응당 받아야 하는 수많은 매그넘 사진가들의 온갖 수고와 매그넘의 명성이 오히려 깎이는 경우는 또 없을까도 싶었다. 더군다나 매그넘 전시회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사진들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하다면 그 왜곡과 오해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번 전시회는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라는 우리 사진계를 오랫동안 옥죄고 있는 과도한 ‘신화’에도 의지하고 있는데, 이는 전시회를 마련한 입장에서도 전시회를 소비하는 관객들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다.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조리개와 셔터속도에 대해 배우는 지점만큼 초반에 접하게 되는 이 용어는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많은 사람들이 십계처럼 따르고 숭배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의 사진가들과 사진들만 보아도 매그넘은 예전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와 로버트 카파에서 지금의 알렉 소스와 마크 파워(Mark Power)까지로 다큐멘터리 사진의 정의와 형식을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여전히 6-70년 전에 남아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순수성과 낡은 계율을 고집하고 있는 형태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굳이 ‘결정적 순간’을 증명하지 않아도 <매그넘 컨택트시트> 전시회는 매우 중요한 70여년 간의 사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명 인물의 사진이 없다고 해도 매그넘과 매그넘의 사진가들이 사진 역사에서는 물론 현대사에서 이룬 업적과 그 가치를 결코 가벼이 여겨질 수 없을 것이다.

 

마틴 파(Martin Parr)는 밀착인화지의 전시회인 <매그넘 컨택트시트>를 두고 “밀착인화지에 바치는 묘비명(epitaph to the contact sheet)”이라고 하였다. 적어도 마틴 파나 예전에 필름을 가지고 작업했던 사진가들이 기억하는 밀착인화지는 거의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진가가 고생하여 촬영한 사진들을 한 자리에 띄우고 현장에서 거둬드린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촘촘히 되살리며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골라내고 실패한 사진으로부터는 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그 과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인화지가 모니터나 태블릿으로 변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왠지 마틴 파의 말도 그렇고 이번 전시회는 왠지 밀착인화지의 확실한 사망선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전시회의 초점을 밀착인화지라는 물질성보다는 사진가들의 작업노트로서 밀착인화지가 가졌던 역할과 가치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중심을 조금 더 옮겼더라면 ‘묘비명’이란 다소 끔찍한 선고는 피해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사진가들의 작업노트’를 대신할 단어로 ‘밀착인화지’만큼 상징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는 없다. 지금의 모니터나 태블릿은 사진가들만의 것은 아니만큼 특별히 애착이 가지도 않고 사진가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어려워졌다. 밀착인화지는 우리들끼리 아는 말이었고 그만큼 애틋하고 또 처연하지만, 우리들의 추억만으로 밀착인화지를 모르는 세대들에게 그 가치를 설명해주기는 어렵다. 그래서 밀착인화지의 물질성이 죽었다고 말하고 유물처럼 취급하기 보다는 밀착인화지가 사진에서 가졌던 가치와 의미에 더 주목하고 그것이 현대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 지에도 주목하고 싶은 바람이 조금 남아있다. 그렇게만 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매그넘 컨택트시트> 전시회는 ‘묘비명’이라는 말 대신에 ‘명예의 전당’이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