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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것도,

그 어디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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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나의 일상만큼이나 지루하다. 주변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같이 보자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극장까지 가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일상을 목격해야하는 일을 반가워하지 않았고, 더구나 인간적으로 찌질하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에서까지 맞닥뜨리는 일에는 더욱 더 진저리를 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또 나와 같은 모습들을 타인에게서도 목격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껏 혼자였다고 생각할수록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안도하였고, 일상이 지루한 만큼 영화속 인물들에 대한 공감은 깊었다.

 

해원이는 잠이 많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잤고, 카페에서도 식당에서도 털썩털썩 쓰러지며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라고 했지만, 엄마는 누구의 딸도 아닌 내 새끼 해원을 남겨두고 훌쩍 외국으로 떠났다. 해원이의 술처럼 취한 사랑은 취하면 취한대로 괴로웠고, 깨면 깨어있는 대로 속이 쓰렸다. 잠이 들면 꿈처럼 빠져들었고, 잠에서 깨면 꿈처럼 아득했다. 

문득, 서촌이 궁금해졌다. 해원이가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던 그 신비한 동네가 보고 싶었다. 서촌에서의 산책은 사직공원에서 시작했다. 적어도 해원과 해원의 엄마는 그랬다. 해원에 따르면, ‘북촌에는 요즘 사람이 너무 붐벼서 서촌까지 걸어왔다.’ <북촌방향>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으로 홍상수 감독은 그렇게 스멀스멀 넘어왔다. <북촌방향>을 그 전에 만들고 이후에 경복궁에서 <우리 선희>를 만들었으니, 감독은 벌써 몇 년째 경복궁과 그 근처를 맴돌고 있다. 

 

예전에 강원도로 경주로 떠돌아다니던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여행하는 와중에도 그 궁상을 떨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에겐 변치 않는 치졸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여주었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떠돌아다니는 가벼운 마음으로 속물근성을 쉬이 드러냈다. 일상을 떠나도 변함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울했지만, 익숙하지 않는 여행지의 풍경과 살짝 들떠있는 여행객의 마음은 사람들의 허물도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게 하였다. 그에 비하면 <누구의 딸로 아닌 해원>의 서촌은 너무 익숙하다. 서울 안, 서촌은 일상에서 너무나도 가깝기에 '일상으로부터 탈출’이라는 말도 어색하다. 현실은 너무 가까웠고, 여행에 대한 기대감도 짧았다. 굳이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다, 서울 안의 서촌이 서울 사람에게도 무척 낯설다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 동네를 도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끼다가 바로 옆의 젊은 공방들과 감각적인 상점들은 다시 낯선 생경함을 준다. 일상의 거리이기도 하고 여행지의 거리이기도 하다. 한국적이면서도 서구적이기도 하다. 예전의 흔적이 많이 남은 동네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목격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호기심도 커지게 이끌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경계에 서있는 듯한 서촌의 풍경에서 나는 일상과 과거가 주는 안정감과 함께 여행지에서 미래를 찾아나서는 마음으로 살짝 들떠서는 계속 가벼운 긴장감을 즐기고 있었다.  

해원처럼 한참을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봤으나 내심 기대했던 애인은 오지 않았다.

해원처럼 한참을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봤으나 내심 기대했던 애인은 오지 않았다.

사직공원 안으로 들어온 해원과 해원의 엄마는 사직단 앞에서 멈추었다. 사직단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적외선 감지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여러 제례는 물론 기우제와 기곡제까지 지내던 제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직단에 대단한 유산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제단인 종묘의 웅장한 정전 같은 건물은 커녕 1미터도 안 되는 높이의 낮은 단이 두 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경계에 서서 안쪽의 평평한 잔디밭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묘한 신비감이 올라온다. 일부러 비운 공간이라는 점과 금지된 영역이라는 이유가 같이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런 성스러운 공간을 해원과 해원의 애인 성준이 침범한다. 스승과 제자, 유부남과 처녀라는 금지된 영역에 이미 발을 들인 그들에게 깨지 못할 규율 같은 건 없다. 

 

사직공원은 사실 서촌에서도 외부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곳은 아니다. 조금은 의아할 정도로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이 생뚱맞게 서 있을 뿐, 그저 주민들이 족구를 하거나, 가벼운 산책을 하는 풍경 정도가 다인 곳이다. 덕분에 사직공원은 주말에도 주중에도 놀라울 만큼의 평정심을 유지한다. 해원이 미스코리아 워킹을 하던 순간에도, 해원과 성준이 입을 맞추던 때에도, 다행히 의식해야 할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해원과 해원의 엄마가 사직공원을 나와 엄마의 모교인 배화여대로 향하는 길가에는 ‘사직동 그가게’가 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사직동 그가게’라는 간판보다 먼저 눈에 띠인 것은 벽에 적힌 ‘록빠’라는 단어였다. ‘친구’, 또는 ‘돕는 이‘를 뜻하는 티벳어인 ’록빠’는 이 ‘그가게’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가게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방문자를 감싸는 향의 냄새나 티벳의 음악보다도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의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모두 인도 다람살라로 몸을 피한 티벳 난민들이나 그들을 후원하는 국내의 자원봉사자들이 만든 물건들이다. 물론 수익금은 모두 난민들을 지원하는데 쓰인다. 나는 손으로 엮은 노트를 구입하고 거스름돈으로 찐 감자를 받았다. 

 

혹시 영화팀이 ‘록빠’를 지원하기 위해 일부러 촬영장소를 이곳으로 삼은 것은 아닐까도 싶었다. 헌데 ‘그가게’ 지킴이에게 물어보니 장소 섭외가 와서 응해줬는데 별다른 말은 없었다고 했다. 그것으로 그 속마음을 알 길은 묘연해졌다. 다만, 영화 이후에 일부러 찾는 이들이 제법 늘었고 촬영 당시 카페와 소품을 같이 팔던 ‘그가게’는 바로 옆에 카페를 따로 내었으니 도움을 준 것만은 확실한 샘이다. 

영화촬영팀은 ‘그가게’의 소품을 하나도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벽에 그려진 큰 그림과 찻잔, 해원이 뒤적이던 책까지 모두 ‘그가게’에 누워있던 것들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원하는 만큼의 돈을 내고 가져갈 수 있는 책들이었다. 살펴보니 그 흔한 베스트셀러도 보이지 않는 낡은 책들이었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내가 희망하는 만큼의 돈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인다고 하니 그 가치를 매기기는 또 쉽지 않았다. 

해원에게 ‘너무 중요’했던 허름한 모텔은 사라지고 번듯한 새 건물이 들어섰다.

해원에게 ‘너무 중요’했던 허름한 모텔은 사라지고 번듯한 새 건물이 들어섰다.

해원이 걷던 서촌의 길은 서촌에서도 조금은 중심을 벗어난 길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거리를 활보하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서둘러야할 지점은 어디에도 없다. 사직공원에서든 종로도서관에서든, 혹은 ‘사직동 그가게’나 '키오스크'에서도 몇 시간씩 머물러있어도 급할 마음은 없다. 그러다 시간이 좀 남으면 박노수미술관까지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오기에도 좋다. 다만, 나는 해원의 발걸음을 따르다 보니 사직공원에서 시작했지만, 다음에는 엄숙함마저 감도는 사직공원에서 차분히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서촌은 가까워서 소홀했고, 그 가치도 잘 보지 못했다. 일상과 여행, 과거와 미래,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선 서촌은 어느 것도 놓치고 싶지 않은 복잡한 우리들의 심정을 닮은 동네처럼 여겨졌다. 우리 모두 현실에서 떠나고 싶어 하지만 현실을 놓쳐버릴까 걱정하고, 옛 것을 그리워하지만 새로운 흐름에 뒤처지기는 또 싫다. 그런 서촌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도 얄밉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며, 안쓰럽다가도 어느 순간 내팽개치고 싶어지는 인물들을 냉정하게 노출시켰다가도 결국엔 품어버린다. 해원처럼 살짝 틀어진 일상의 꿈을 꾸다가, 깨어나서는 몽환적인 감각으로 현실을 끌어안게 하는 동네가 서촌이다.   

해원과 엄마가 대화하던 배화여고 입구 앞 키오스크는 단 두 세명 정도만 앉을 수 있는 좁은 카페다.   대화가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커플이 오면 주인장은 커피만 내주고는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며 딴청을 피운다.

해원과 엄마가 대화하던 배화여고 입구 앞 키오스크는 단 두 세명 정도만 앉을 수 있는 좁은 카페다. 대화가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커플이 오면 주인장은 커피만 내주고는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며 딴청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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