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사라져 간다 해도,
잃을 수는 없는 것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쇠망을 지켜보는 ‘Deadline’ / 윌 스테이시 Will Steacy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는 1829년에 창간한 신문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미국의 신문 중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정치가 탄생한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언론이며, 미국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발행부수를 가지고 있었다. 퓰리처상을 19번이나 받았고 199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약 9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그랬던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2000년대부터 어려움을 겪다가 2009년 3억9천만 달러(4,625억)의 부채로 인해 파산을 선고받고 그 이후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고 건물을 옮기고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현재는 210명만이 남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조차 십년 전의 연봉에서 엄청난 삭감을 감당해야했으며 그럼에도 그들의 미래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구조조정에서 정리해고된 사람들 중에는 인콰이어러에서 29년간 편집자로 있었던 톰 스테이시(Tom Steacy)도 있었다.
톰의 아들인 윌 스테이시(Will Steacy)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직장이었던 신문사를 방문하곤 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곳곳에 새 신문과 오래된 신문이 섞여서 산처럼 쌓여있고 잉크 냄새가 진동하던 곳이었다. 사진가가 된 윌은 인콰이어러가 파산을 신고한 2009년에 아버지의 직장이자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던 신문사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관한 프로젝트 ‘Deadline’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인콰이어러의 지금과 같은 미래도 2012년 아버지의 해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는 언론사를 기록하려고 했던 프로젝트는, 결국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언론을 지켜볼 수 없는 처참한 목격이 되고 말았다. 2009년, 인콰이어러의 파산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2014년 인콰이어러가 87년간 있었던 건물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인콰이어러가 떠난 필라델피아의 역사적인 건물 ‘진실의 탑(Tower of Truth)’을 인수한 개발자는 이곳을 카지노호텔로 바꾸려하고 있다.
“만일 내가 언론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언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입장이 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정부 없는 언론을 선택할 것이다.”
윌 스테이시는 ‘Deadline’의 서문에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 중의 한 명이자 3대 대통령이기도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말을 담았다. 토마스 제퍼슨이나 윌 스테이시의 말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윌 스테이시와 그의 프로젝트 ‘Deadline’의 걱정은 단순히 아버지의 실직이나 한 신문사의 위기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윌은 기존에 종이와 인쇄에 기반을 둔 언론들이 사라져가는 자리를 대신 메우고 있는 새로운 매체들이 감각적이고 소비적인 정보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체의 형태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까지 거슬릴 수는 없다고 해도, 기존 언론들이 우선 가치를 주던 신념과 원칙들까지 사라져가고 있다면, 결국 우리가 잃는 것은 일자리와 신문사만은 아닐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Deadline’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고 됐는가?
여러 작업에서 줄 곧 미국의 특징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회, 경제적 이슈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미국의 여러 조직이나 기관들을 탐구해왔다. 언론은 미국의 훌륭한 조직 중의 하나이다. 가족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항상 신문사 사무실의 곳곳을 누비면서 자랐기 때문에 언젠간 그곳에서 촬영을 할 게 될 거란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다. 또한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헌법이 처음 쓰이고, 첫 일간신문이 발행된 도시이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
‘Deadline’는 장기 프로젝트이고 요즘 위기에 처한 언론사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는가?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당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파산에서 재기하고 있었고, 디지털 시대라는 커다란 변화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기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인콰이어러를 통해 언론사의 고충을 기록하고 싶었다. 솔직히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지금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했다. 경제침체에서 점차 회복되면, 그런 어려움도 극복한 인고와 인내를 담은 프로젝트가 될 줄로만 생각했다. 한동안 그들은 정말 잘 해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같은 전쟁터에서 제한된 인력만으로 매일매일 최선을 다했고, 그 노력으로 3년 동안에만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록키와 같은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낸 신문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해한해 지나가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스러운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강제휴직과 기업인수, 정리해고와 예산삭감 등이 이미 지쳐버린 신문사 직원들을 숨통을 죄었다. 나조차 그렇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즘 언론사에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한 때 인콰이어러는 하루에 5만 달러(약 6천만원)씩 손실을 입기도 했다.
아버지가 인콰이어러에서 일하셨는데, 아버지의 동료들과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
이번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도 아버지 동료들 중에서 몇몇 분들의 이름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 질문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사무실에서 있으면서 곧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내게 됐다. 커다란 삼각대에 올려놓여진 대형 카메라로 촬영했기에, 어디서 촬영을 해도 나는 그들 눈에 띄었고 그렇게 다가온 사람들은 수많은 질문을 했다. 몇주만에 많은 기자들과 편집자들을 알게 되었고, 이전에 이름만 기억하던 사람들의 얼굴도 드디어 익히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초기에는 보도국에 앉아서 직원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무면서 신문과 저널리즘 등에 관한 것을 배웠다. 그리고는 내가 배운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조각칼처럼 사용해서 나의 비주얼 내러티브를 다듬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역시 아버지가 실직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지난 십 년간 신문사 관련 산업에서 4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으며 신문사는 지금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일을 잃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바람이 불어온 보도국에서 안전한 사람은 없었고, 결국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치고 말았다. 아버지가 실직 사실을 알려온 후에 잠시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작업과 개인적인 감정을 떼어놓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고민한 후에 다시 돌아간 보도국에서 처음 촬영한 대상은 아버지의 빈 책상이었다. 그때가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도 언론인이었다고 들었다.
내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증조부의 할아버지로까지 올라간다. 증조부의 할아버지가 1876년에 ‘이브닝 디스패치(The Evening Dispatch)’라는 언론사를 창간했다. 그 이후로 우리 집의 가업과 같은 언론인으로의 시간이 우리 아버지까지 144년 넘게 이어졌다. 2011년에 아버지가 실직을 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29년간 인콰이어러의 편집자로 일하셨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해도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업종이라도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거라고, 또한 감원과 예산산감이 그렇게 잔혹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인콰이어러가 87년간 있었던 필라델피아의 상징적인 건물에서 쫓겨나리라고는, 또 아버지가 그렇게 정리해고되리라고도 상상조차 못했다.
다만, 아버지의 실직으로 계기로 아버지와 가까워졌고 신문이라는 언론매체에 더 애정을 갖게 되었다. 5대를 이어간 가업인 언론에도 더 깊은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선조들을 모두 뵙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의 다락방에 보관되어있던 그 분들의 소장품과 기록들을 보면서 그 분들과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이었고, 어떤 신념을 갖고 계셨고, 그들 모두가 일생을 바치며 공헌했던 언론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도 그들을 바라면서도 거울을 보듯 그들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의 전통과 언론에 대한 헌신이 이대로 사라지게 놔둘 수는 없기에, 나는 계속 언론인으로서 사명감을 이어갈 것이며 내 아들에게도 물려주고 싶다.
이 프로젝트 이전까지는 언론인은 물론 포토저널리스트라기보다는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사진가로서의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Deadline’ 이후로 변화가 생겼는지.
신문사에서 5년간의 작업을 하는 동안, 그곳이 집처럼 편안해졌다. 보도국을 감싸는 어떤 기류를 느꼈고 그 기류 속에는 내가 호흡하는 에너지와 끼가 숨겨진 것만 같았다. 아직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신문사에 들어설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자라면서 펑크락을 듣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권력에는 항상 저항심을 갖고 있었다. 아직도 나는 상당부분 그때의 나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문사에서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언론만큼 더 정열적이고 파괴적인 음악은 없으며, 언론인만큼 부패한 정치와 기업, 위선자들, 그리고 도적들과 사기꾼들에 굳건하게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나는 더 이상 이상주의자는 아니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이기도 하다. 변화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할 수 없으며, 나 자신도 아직 모른다.
몇 년간에 걸친 돈 사패킨(Don Sapatkin)의 책상과 주변의 변화가 특히 인상에 남는다.
물건들이 어지럽게 놓인 그의 책상을 그곳에서 가장 좋아했다. 그의 책상보다 더 어지럽고 신문이 높게 쌓인 책상도 있기는 했는데, 행여나 무너져내릴까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Deadline’은 많은 주목을 받았고 특히 언론사들의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모두 인콰이어러가 역사를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꼈다고 생각하는가?
단순히 내 프로젝트에 모든 것이 담겨있어서,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언론사들은 이제 동병상련을 지나 ‘패닉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신문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산업이며 반 이상의 미국인은 신문사들이 겪고 있는 재정적인 어려움조차도 모르고 있다. 기자들이 줄어들수록 뉴스 또한 줄어들 것이며, 뉴스가 줄어들면 우리가 아는 것도 따라서 적어질 것이다. 미국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신문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단순히 위기 정도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미국에서 지금과 같이 빈부의 격차가 심한 때는 없었다. 백만장자가 억만장자가 되는 동안, 중산층은 사라져갔다. 시민단체들이 힘을 잃은 시대가 되면서 권력은 재분배되었고, 돈은 정치인들의 캠패인으로만 몰렸다. 우리가 기자, 편집자, 기사, 신문을 잃으면서, 정보와 지역 사회와 사람들을 묶는 끈도 잃고 있다.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잃을 것이다. 언론은 단순한 산업 그 이상이다. 언론은 ‘시빅 트러스트(civic trust)’처럼 우리가 힘을 합쳐 지켜야하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