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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퍼를 위한, 서퍼에 의한,
‘그래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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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건창호 제공

서퍼를 위한, 서퍼에 의한, ‘그래이곳’

 

서핑은 예전에는 해외에서만 즐길 수 있는 레포츠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이 즐기고 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성장한 서핑 문화는 강원도 동해로 젊은 세대들이 모여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서핑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동해의 일부 지역은 그로 인한 과도한 개발과 상업화가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동해의 조용한 환경에서 거주하면서도 서핑을 즐기고 싶었던 건축주가 찾은 보석 같은 지역은 금진해변이었다. 서퍼들이 몰리는 죽도해변과는 60km 떨어져 있고 강릉시와는 27km 정도로 적당한 거리의 금진해변은 정동진 아래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이다. 주거지에서 좁은 1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모래알을 밟고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금진해변에서 선 서퍼 건축주는 “그래, 이곳이야”라고 자연스럽게 내뱉었을 것이다.

금진리는 이곳 또한 서핑 문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소수의 서핑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단독주택이 채우고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금진해변을 바로 마주하고 바다로 트인 자리에 3층의 ‘그래이곳’ 주택이 우뚝 서 있다. ‘그래이곳’은 도로로 난 전면에서는 물론 측면에서도 같은 창문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창문들은 ‘그래이곳’의 외관을 다이내믹하게 꾸며주는 동시에 내부 공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창문 하나하나를 고르며 고심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건축주와 건축가의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3층 높이의 건물이 흔하지 않은 금진리에서, 그것도 길가에 자리한 ‘그래이곳’이 크게 눈에 뜨이거나 풍광을 해치지 않는 데에는 시원하게 난 창문과 함께 부드러운 그레이 톤의 외벽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하늘과 부드럽게 연결되는 외벽은 금진리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겸손함을 갖추고 있다.

 

이를 위해 마당이 주차 공간을 품게 했고 입구는 레벨이 높은 후면으로 내었다. 주차 공간은 필로티로 만들어 눈비가 내려도 여유롭게 내리고 탈 수 있게 하였다. 필로티 공간은 주차장이기도 하지만 연장된 마당이기도 해서 실외와 실내를 잇는 처마와 대청마루의 기능도 하도록 설계했다. 전통적으로 처마밑과 대청마루는 눈비에 젖지 않고 가장 가까이 자연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처마밑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바라보던 여유를 ‘마당 향한 집’의 필로티에서 다시 찾았다.

 

뿜칠 마감된 거친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는 그레이 톤 외벽은 자칫 밋밋하고 차갑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1층 전면에는 따뜻한 느낌과 함께 파사드에 무게감을 더하는 우드로 채워져 있다. 1층 주차 공간으로 들어서도 천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우드는 통일성과 함께 안정감을 더해준다. 그리고 주차장 한쪽에는 해변의 모래와 바닷물을 씻어내려 주는 야외샤워기가 설치되어 있어 이곳이 서퍼의 거주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시작되는 계단은 비틀어진 사다리꼴 형태로 이어진다. 설계도 공사도 녹록하지 않은 돌림계단은 수직의 집 전체를 가르는 연속성을 제공함과 동시에 곳곳에 1.5층과 2.5층과 같은 독특한 공간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더불어 3층 천장에 난 창문을 통해 내려오는 햇빛은 계단을 직간접적으로 비춰주며 계단실 전체를 버려진 공간이 아닌 입체감 살아나는 흥미로운 공간으로 바꾸어준다. 

 

계단실을 나와 2층으로 들어서면 수평으로 길게 트인 창문 사이로 눈앞에 손에 닿을 듯 펼쳐지는 금진해변과 동해가 시선을 빼앗는다. 자석에 이끌리듯 풍경을 따라 이른 창문 앞에는 널찍한 윈도벤치를 두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한참을 머물게 된다. 이처럼 종일을 보아도 지루할 것 같지 않은 풍광을 넉넉하게 품고 있는 2층에는 거실, 주방, 다이닝룸을 두어 가족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주생활 공간으로 구성했다.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을 다른 가족까지 훤하니 내려다 보낼 수 있는 조망은 가족의 생활공간을 해변으로까지 잇는다.

 

계단실을 감싸고 있는 모서리를 돌면 깊숙한 공간이 나오고 이 공간은 작은 나무가 심어져 있는 외부 테라스로 이어진다. 테라스는 건물의 기둥이 남아 품으며 3층까지 뚫린 보이드 공간 안에 있기 때문에 외부이기도 하고 또 내부이기도 하다. 바깥과의 경계를 우드 루버가 촘촘히 가리고 실내로 이어지는 안쪽으로는 폴딩도어를 두었기에, 문을 활짝 젖히면 아담한 정원과 같은 테라스의 자연을 2층 실내로 깊숙이 들일 수 있다.

 

3층으로 오르기 위해 다시 계단실로 들어서면 중간중간에 난 재미있는 창문들이 여러 번 발길을 붙잡는다. 천창을 통해 내려오는 햇빛을 받으며 우드 계단턱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공간이다. 사진 액자나 인테리어 아이템을 둘 수 있는 내부선반까지 더해 계단실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이야기가 담긴 갤러리 복도처럼 여겨진다.

 

계단에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가까스로 뿌리친다고 해도 멀리 가지 못하고 2.5층에 있는 작은 방에 다시 붙잡히게 된다. 작은 방에 들어서면 금진해변부터 멀리 금진항까지 품고 있는 코너 90도 창 너머 풍경이 역시 시선을 붙잡는다. 작은 방은 건물의 조각을 들어낸 듯한 틈을 두고 3층과는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된 느낌을 준다. 부모로서는 섭섭하겠지만, 아이가 클수록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부부를 위한 3층 공간은 큰 방과 함께 서재 또는 3층의 공용공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을 더하고 있다. 문턱도 없이 각 방을 구분하고 있는 미닫이 도어와 폴딩도어를 낮에 모두 열면 3층 전체가 하나의 열린 공간으로 느껴지겠지만, 밤이 되면 문을 닫고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숨어들기에도 좋다.

계단실이 2층에서는 벽으로 둘러싸인 조금은 닫힌 공간이었다면 3층에서는 폴딩도어를 거두고 확장하여 연결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더구나 천창을 통해 바로 계단으로 떨어지는 햇빛은 3층 공간의 깊이를 더해주는 동시에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뛰쳐나가고 싶도록 유혹한다. 옥상에 올라 뒤로는 산을 등에 지고 앞으로는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면 온몸의 감각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다. 안전을 지키면서도 시선을 가리지 않는 유리난간은 옥상 깊은 곳에 캠핑 의자를 펴고 앉아 있어도 변하지 않을 넉넉한 풍경을 제공한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직업으로 하는 일이 일치하는 생활을 꿈꾼다. 비슷한 이유로 좋아하는 취미를 가까이 즐길 수 있는 곳에 집을 꾸리고 살고 싶은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그래이곳’의 가족은 그 꿈을 실현해버렸다.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하게 움직인 젊은 부부에게 누군가는 유별나다고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 사람들은 캘리포니아의 젊고 힙한 부촌 헌팅턴비치도 이렇게 시작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이건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