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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접점을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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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의 여행

애초에 우레시노(嬉野,うれしの)를 들리려고 했던 건 조용한 온천 마을을 찾으면서였다. 규슈에 오면 다들 간다는 벳부나 유후인이 관광객으로 넘쳐난다는 소문을 듣고, 다들 간다니 왠지 가기 싫은 심술이 들었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이번에 같이 모시고 다녀온 부모님께서 이미 유후인을 다녀오셨다. 그래서 좋은 핑계도 생겼겠다, 다른 곳을 가보자고 제안을 드렸다.

사실 부모님은 여행사의 패키지여행이 더 편하다 하신다. 그런 부모님께 내가 일정을 다 짜고 가이드 역할도 다 할 테니 맡겨달라고 말씀드렸던 것은 내 오기이기도 했고 오만이기도 했다. 혼자 여행할 때나 아내와 여행할 때와 달리, 부모님과의 여행 일정을 짤 때는 고려해야 할 점들이 참으로 많다.

가장 큰 것은 여행 속도의 차이였다. 나와 아내는 한곳에 오래 머물며 소소한 것들을 천천히 관찰하며 즐기는 여유로운/게으른 속도를 가졌지만, 부모님은 쫙 한 번 훑어보시고 사진 몇 장을 찍으신 뒤에 서둘러 자리를 옮기는 단체 관광 패키지의 속도를 갖고 계시다.

내가 짠 이번 일정에서 우레시노는 점심시간을 포함해 최소 오후 6시간을 비워두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준비했던 우레시노에서의 콘텐츠는 2시간 만에 동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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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부드럽게

점심까지는 순조로웠다. 우레시노에 도착하자 이곳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온천 두부(溫とうぶ)'를 찾아 유명한 '소안 요코초(宗庵 よこ長)'에 먼저 들렸다. 평일 점심이지만 3팀 정도가 앞서 기다리고 있다. 더블 파킹을 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지만 꽉 차 있었고 어차피 (그때까지만 해도) 우레시노에 오후 내내 머물 생각을 했기에 일행을 먼저 식당 앞에 내리고 가까운 공영주차장까지 차를 몰았다.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걸어오니 딱 맞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벽에 일본어로 수많은 메뉴들이 붙어 있고,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도 제법 두꺼운 것으로 봐서는 온천두부 외에도 많은 메뉴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결정장애를 가졌거나 우리와 같이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여행객의 고충은 직원이 내민 단 한 장의 메뉴판으로 해결되었다. 정식 메뉴는 단 3가지로, 반찬 수로 가격이 달라졌다. '온천두부정식', '특선온천두부정식', '요코초 가이세키'. 반찬이 어차피 겹칠 것 같아서 두 명은 '특선'으로 두 명은 '가이세키'로 주문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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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도가 아닌 일본 속도를 가지고 마침내 음식이 나왔다. '가이세키'라고 하지만 료칸에서 먹는 그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한 쟁반에 모두 함께 나온 반찬은 언뜻 '특선'과 그다지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잠깐 갸우뚱했지만, 이내 온천두부 맛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너그럽게 잊고 말았다.

온천에 오랫동안 담가 둔다는 온천두부는 순두부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했다. 워낙에 손두부도 순두부도 좋아하는 두부덕후라 외국이면서도 음식에 대한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대인기'라는 '오카라고로케(おからコロッケ)'도 먹어보고 싶었지만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아이스크림 간판을 보고 양보하기로 했다.

만족스러웠던 점심을 마치고 나는 '소안 요코초' 옆의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망설임 없이 서 있었다. 그런데 마치 식당에서 같이 운영하는 듯 꼭 붙어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에는 웬일인지 직원이 보이지 않는다. 어물쩡하는 사이에 부모님은 성큼성큼 멀어지셨고 결국 고로케도 아이스크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패키지의 속도가 리드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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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

평일이라서 그런지, 비수기라서 그런지, 식당을 벗어나자마자 우레시노의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관광지라기보다 그냥 평범한 주택가 같았고, 관광객을 위한 상점보다는 주민을 위한 상점들이 더 많아 보였다. 그래서 그 점이 더 좋았다. 관광객이 아닌 여행객이 되어, 혹은 약간 욕심내어 주민처럼 동네를 어슬렁거려 보았다. 관광객을 위한 상점과 상품들에 유혹되지 않고 되고, 마을의 작고 소소한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한가롭고 여유로운 발걸음에, 걸어 다니면서도 마치 누워 있는 듯 마음이 평화롭게 늘어졌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약간 다르신 듯했다. 빠르게 걸으시던 부모님은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한 바로 그 말을 꺼내셨다. "다 본 것 같은데." 그때 나는 당황하지 않고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듯 우레시노에 왔으니 온천을 가보자고 말씀드렸다. 온천에서 수건을 빌릴 수도 있지만 나는 수건도 미리 챙겨왔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온천 경험이 많은 부모님께서 온천은 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면 가장 좋다고 말씀하신다. 아차, 그렇구나. 글로만 온천을 배운 온천초보의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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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냥이

1~2시간을 계획했던 온천일정이 날아가자 나는 마치 준비된 플랜B인 듯 우레시노에는 무료 족탕도 있다며 위기를 수습해 보기로 했다. '소안 요코초' 바로 옆에도 족탕이 있었지만 동네를 구경한다며 돌아다니다 '시볼트의 족탕(シーボルトのあし湯)' 앞에서나 신발을 벗었다. 족탕의 물은 생각보다 뜨거웠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미끌미끌한 감촉이 확실히 일반 물과는 달라 보였다. 다행히 부모님도 우리도 모두 족탕을 즐겼다.

다 같이 발을 담그고 있는데 기모노를 입고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한 아주머니가 4잔의 녹차를 들고 와서 권했다. '도조, 도조'. 모퉁이에 보이던 기념품 상점에서 나오시는 것을 봤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차마 거절할 수는 없어서 받았다. 그래도 두 손으로 들고 있으니 손도 따뜻해지고 마시니 녹차의 맛도 깊었다. 다만 잔을 돌려줄 때는 굳게 마음먹고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나오리라 다짐했다.

우레시노는 온천두부와 함께 녹차가 유명하다고 하니 녹차를 하나 사갈 생각이 있긴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녹차 살 곳을 점 찍어둔 상태였다. 우리에게 녹차를 가져다준 기념품 점은 최근에 생긴 듯 말끔한 인테리어에 녹차 말고도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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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집에서 한 집 건너에는 아주 낡고 오래된 '다루마 상점(だるま商店)'이 하나 있었다. 그 낡은 간판이 인상적이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닫힌 유리 문안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냥이에 자석처럼 끌리는 본능 때문에 냥이의 관심을 끈다고 어느새 유리 문 앞에 바짝 붙게 되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가게 안 뒤쪽에서 슥- 하고 나오신 할머님께서 다짜고짜 일본어로 긴 설명을 시작하신다. 일본어를 잘 모른다고 말씀드리니까 그때부터 할머님의 몸짓도 바빠지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갈은 녹차를 내 코밑에 내밀으신다. 향기를 맡으라는 거겠지? 향기가 정말 좋네요, 라는 말을 일본어로 전할 수 없어 표정으로만 한껏 보여드리고 있는데 들어오라고 연신 손짓을 하신다.

너무나도 열심히 설명하시고, 계속해서 들어오라고 하시기에, 들어가 구경하고도 싶었지만 이 정도면 무언가를 꼭 사야 될 것 같은 부담감도 있었고 이미 부모님도 한참을 멀어지고 계셨기에 부득이 사양하고 자리를 떠났던 가게였다.

그러다 시볼트 족탕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달마상점에서 녹차를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잠긴 문을 여러 번 두드려도 할머님께서 나오시지 않았다. 하다못해 시크한 냥이조차 눈길을 주지 않는다. 포기하고 족탕에 한참을 앉아 있어도 할머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결국, 아이와 함께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중국인 부부가 있어서 족탕에서 일어나야 했는데 그때까지도 할머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달마상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할머니, 스미마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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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여행

시볼트의 족탕 바로 앞에 '우레시노 카페(嬉野カフェ)'가 보였다. 원래 우레시노에서의 계획 중에는 카페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클래식한 바를 지나치며 그곳에서 글렌피딕을 한 잔 즐기는 모습도 상상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라고 적고 아버님이라고 읽는다)은 바는 둘째치고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카페에 갈 이유는 없다고 여기시는 분이다.

우리만의 일정을 짤 때는 매우 느슨해서 갑작스럽게 마추칠 'serendipity'를 기다리고 또 즐기는 편인데,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서 'serendipity'가 발생한 여유는 그닥 없었다. 조금만 걸음이 느려져도 '다음은 어디야?'를 외치시는 바람에 결국 2시간 만에 우레시노에서의 콘텐츠가 소비된 나는 사가(佐賀,さが) 시내로 급히 도망을 가기로 한다.

여행의 목적과 패턴이 다른 부모님과 여행할 때는 확실히 평소의 여행 습관과 속도를 많이 조절해야 하고 포기도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당신들만의 여행 방식을 고집하시는 분도 아닌데도 그렇다. 이번 여행에서 두 분이 내내 하신 말씀도 "니네들 위주로 다녀. 우린 따라만 다닐 테니까,"였다. 하지만 평생의 습관이나 기호가 그렇게 쉽게 바뀔 수는 없다. 강한 의지도 오랜 습관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분명, 부모님도 우리를 위해서 보고 싶으신 것, 드시고 싶으신 것 등 많은 것을 포기하셨을 것이다. 결국, 이번 여행은 '여행원칙'이 거의 양끝에 서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부모님과 우리 모두가 조금씩 포기하며 접점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어야 했다.

부모님 덕분에 확실히 이번 여행에는 많은 곳을 다녔다. 그리고 부모님 덕분에 우레시노를 다시 찾을 이유도 얻었다. 다음엔 바앤카페에서 글렌피딕도 한잔하고 달마상점을 찾아 할머님도 우리 냥이도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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