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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과 분노의 드라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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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저러한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캐릭터가 흔하다. 때로는 이는 복수에 나서는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플롯을 전환하는 극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드라마에 나오는 죽음의 수에 비해서 그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버텨내야 하는 사람의 슬픔과 고통에 비중 있게 집중하는 드라마는 의외로 많지 않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부담스럽고, 겪고 있는 사람들에겐 마주하기 쉽지 않은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경험의 여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겐 긴요한 치유의 과정일 수도 있기에, 고통스럽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상실의 후유증을 다룬 드라마를 몇 편 살펴본다.

<데드 투 미> 뺑소니 사고로 남편을 잃다 (넷플릭스)
젠(크리스티나 애플게이트)은 최근 뺑소니 사고로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었다. 여전히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두 아들도 있는데 혼자 남은 젠은 슬픔, 그리고 분노에 잠긴다. 드라마 파일럿의 첫 장면은 자신을 위로하고자 직접 만든 음식까지 들고 온 따뜻한 이웃을 차갑게 대하는 젠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사별한 주인공을 동정할 여유도 없이 시작한 드라마는 그 이후에도 날카롭고 분노하며 냉소적인 젠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이쯤 되면 시청자에 대한 시험과도 같다. 상실이라는 긴 고통의 터널에 들어선 사람의 변화에 주변 사람들은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초기에 당분간은 이해한다고 해도, 따뜻한 포옹도 매몰차게 대하고 위로의 말에도 분노하는 사람을 매일매일 감당할 수 있는 성인은 드물다. 혹시 남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할까?

 

그런 젠에게 때마침 주디(린다 카델리니)가 나타난 것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을까? 왠지 항상 불안정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인 기운을 뿜어내기도 하고 놀라운 이해심을 가진 주디는 곧 젠의 베프가 된다. 젠에게 한 가지 또 다행인 것은 이 드라마가 상실의 고통을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또 그 무게로 시청자들을 짓누르지 않는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분노를 조절 못 하는 젠도 갈팡질팡하는 주디도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플리백> 가족보다 가까웠던 친구의 사고 (아마존)

번듯한 이름도 하나 없이 ‘더러운’ 별명만 가진 플리백(피비 월러-브리지)은 처음부터 다짜고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걸어 시청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를 더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행색이다.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이 섹스에만 몰입하고 있는 듯한 플리백은 인간관계도 사업도 처참하게 실패한 듯하다. 남친은 물론 가족에게서도 점차 버림받기 시작하고 베프 부와 함께 시작한 작은 카페도 부지런히 말아먹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플리백은 늘 즐거워만 보인다. 플리백의 엉뚱한 행동과 언행에 어이없이 하다가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면 시청자도 그냥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만다. 왜 혼자만 즐거운 거야? 우린 언제 정이 든 거야? 주변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플리백의 서글픔과 외로움이 왜 낯설지 않은 거야?

 

<플리백>은 영국식의 건조하고 냉소적인 유머가 가득한 코미디이지만 그 사이사이 빠르게 지나가는 부의 기억은 어김없이 플리백의 웃음을 거둬버린다. 그러다가 곧 죽은 베프의 무게가 생각보다 플리백에게 가볍지 않음을 점차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무게의 상당 부분이 죄책감이라는 것 또한 드러나게 된다.

<레프트오버> 인류의 2%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 (HBO)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는 타노스의 스냅으로 절반의 인구가 사라진 5년 후의 모습이 잠시 그려졌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의에 빠진 영웅들과 급격히 변한 삶의 환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절반이나 사라지는 일은 슈퍼히어로에게도 인류에게도 정말로 엄청난 일이다. 그 엄청난 일을 조금 더 자세하게 지켜보고 고민하는 드라마가 <레프트오버>다.

 

<레프트오버>는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인류의 2%가 사라지는 ‘갑작스러운 이별’로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3년이 지난다. 50%, 20%도 아니고 겨우 2%라니, ‘엔드게임’에 비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수치처럼 느껴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남은 인류는 통계와 수치를 무력하게 만드는 엄청난 후유증을 떠안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레프트오버>는 상실을 다루는 드라마라면 늘 있기 마련인 회상 장면이 거의 시즌 1 말미까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그런가 보다 하고 익숙해지면서 포기할 무렵 드라마는 불쑥 3년 전 ‘이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암울하고 불안한 상실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행복해 보이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마음은 절대 다시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다.

 

하지만, 드라마의 잔인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막상 행복해 보이던 순간에도 이미 인간관계에 균열들이 있었고, ‘이별’은 그것을 드러내는 촉매 역할을 한 것뿐이라는 깨달음은 타노스도 휴거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마저 버겁게 느껴지게 한다.

<쏘리 포 유어 로스> 남은 사람을 괴롭히는 자책감 (페이스북 왓치)

마블 시리즈에서 연인인 비전의 죽음을 여러 번 지켜봐야 했던 것도 모자라 한 번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야만 했던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에게는 그 이후에도 비보가 전해졌었다. 페이스북 드라마 <쏘리 포 유어 로스>에서 엘리자베스 올슨은 남편을 잃고 혼자 남은 아내 리를 연기했다. 제목이 말해주듯 드라마는 남편을 잃은 아내의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전면적으로 다룬다.  

 

남편 매트(마모두 아티)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리의 사소한 행보나 결정 하나하나에 여전히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로 인한 리의 고민과 고통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까운 친구와 가족조차 그녀를 포용할 수 있는 한계를 쉽게 드러낸다.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할 때이지만, 리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대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오히려 더 고립되어 보인다.

 

혼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안해하는 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우울증을 겪고 있었던 매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다. 더구나 매트가 자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은 그 자책감을 끝까지 밀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자살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죽이는 행동이라는 것을 리는 처절하게 보여준다.

<디 어페어> 평생 가슴에 뭍게 된다는 자식의 죽음 (쇼타임)

아내, 그리고 4명의 아이까지 함께 나선 여행지에서 노아(도미닉 웨스트)는 매력적인 젊은 식당 종업원 앨리슨(루스 윌슨)을 만난다. 노아와 앨리슨은 모두 기본적으로 삶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하다. 다만, 노아가 실패한 소설가로서 자존감을 잃은 정도라면, 앨리슨은 4살의 어린 아들을 눈앞에서 잃었다는 큰 차이가 있다. 자식을 잃은 상실감에 짓눌려 있는 듯, 앨리슨은 잔잔하게 입술을 떨며 불안한 듯한 시선으로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바라본다. 

 

사별의 범위를 넘어서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한다. 앨리슨이 자해한 허벅지의 수많은 상처가 오히려 작아 보인다. 자식을 잃은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더욱 견고하게 뭉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이후 이혼하는 부부도 적지 않다. 이혼이 되었건 불륜이 되었건, 어쨌든 앨리슨도 남편을 떠나게 된다. 남편 콜(조슈아 잭슨)은 불같은 성격이 있기는 해도 앨리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배우자였다. 하지만, 부부가 아들을 잃은 상처에 대응하는 자세나 치유하는 방법은 달랐다. 또한, 아침마다 봐야 하는 콜의 등에 있는 문신처럼, 남편은 끊임없이 죽은 아들을 상기시키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2년이 지나도 4년이 지나도 아이를 잃은 앨리슨의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마, 20년이나 40년이 지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새로운 사랑도 새로 가진 아이도 앨리슨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결국, 앨리슨은 불행한 결말을 맞지만,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다. 앨리슨은 인간으로서 가장 두려운 상실을 이미 겪었고, 그에 비하면 자기 자신의 죽음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