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학문의 향기가 피어오르다,

강진 다산초당

​웰촌, 한국농어촌공사

우리시대의 지식인인 유시민 작가는 다산 정약용을 ‘조선시대 5백년 중 최고의 지식인’이라며 손꼽았습니다. 다양한 학문에 대한 탐구와 열린 자세를 가지고 성리학, 자연과학, 건축학, 공학, 행정학, 법률학, 의학, 그리고 서학(천주교)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지식 때문에 ‘조선의 다빈치’라는 수식어도 갖고 있죠. 그런데 서학에 대한 다산의 관심은 두 번의 유배를 떠나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다산은 18년 동안의 두 번째를 유배를 이곳 강진에서 보내게 됩니다.

입구에서 만난 돌담과 늦가을의 흔적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도 15분 정도 가벼운 산행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등산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숨을 고르고 느긋하게 올라갑니다. 
산으로 들어서면서 상쾌한 공기 때문인지 가슴이 부풀어 오르네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짧은 시간에도 숨이 조금은 가빠집니다.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 한 내 자신을 탓해야죠. 

왜 ‘뿌리의 길’인지 알겠죠? 주변도 살피면서 쉬엄쉬엄 올라요

바닥만 보며 오르다가 나무뿌리가 올라와 이루어진 독특한 길을 발견합니다.
기괴한 모습에 잠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걷다 보면 미끄러운 돌보다 오히려 발걸음이 안전하다고 느껴집니다.
정호승 시인도 이 길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돌계단과 대나무 펜스도 정성스럽게 놓인 길입니다. 이제 고지가 보입니다

얼마나 더 가야하지, 하고 궁금해질 때 쯤 깊은 나무숲 사이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본 다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을 집필한 곳입니다.

사실, 다산은 다산초당에 거주하는 동안 위의 세 저서를 포함해 무려 500여권을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18명의 제자들이 있어서 함께 집필 작업을 도왔습니다. 

제자들은 다산과 함께 차를 마시고 학문을 논하면서 산 속에서의 외롭고 힘든 유배 생활에 소중한 말벗이 되어주었을 것 같네요.

다산초당에서는 서암이 잘 내려다보입니다

다산초당에 오르자마자 모이는 것은 제자들이 거주했던 ‘서암’입니다. 
원래 ‘서암’은 건물의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동암’과 함께 1975년에 강진군에서 재건했습니다.
다산초당은 그보다 앞선 1957년에 초가를 허물고 지금의 기와집으로 지었는데,
곧 다시 원래의 ‘초당(草堂)’으로 되돌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건물도 좋지만 원래의 초가로 돌아가면 조금 더 다산을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네요.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다산초당부터 찾아옵니다

드디어 오른 다산초당은 조용하고 울창한 숲 사이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고 있습니다.
다산은 18년의 강진 유배 생활 중 11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7년 동안 제자의 집과 주막을 전전하며 힘든 생활을 보내기도 했죠.
그러다 차가 많아 ‘다산(茶山)’이라고 불리던 만덕산에 있던 외가 해남 윤씨의 ‘다산서옥’을 들렸던 다산은 시를 써서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에 윤씨네에서 거처를 내어주면서 다산 정약용의 ‘다산초당’이 되었습니다.

연못 가운데의 돌산 연지석가산과 차를 끓이던 다조

다산초당 주변에는 이곳을 더 특별하게 해주는 ‘4경’이 숨겨져 있습니다.
처음 먼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 것은 초당 옆에 자리 잡은 연못 ‘연지’입니다.
‘연지’ 가운데에는 작은 돌산이 정원석처럼 쌓여져 있는데,
다산이 바닷가의 돌을 주워와 쌓은 후 ‘석가산’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연못에는 잉어도 있었는데 다산이 이곳을 떠난 후에도 
제자들에게 잉어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애정을 보이셨다고 하네요.
그리고 집 앞마당에 있는 낮고 너른 돌 ‘다조’도 보입니다. 
부뚜막과 같은 곳으로 솔방울로 불을 피워 차를 달이곤 했다고 합니다.

샘이 솟는 약천과 ‘정’을 새긴 정석

나머지 2경을 찾는 거부터는 조금씩 어려워집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다산초당의 집 옆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샘터를 발견했습니다.
땅 위에 물기가 촉촉한 것을 보고 다산이 직접 파서 만든 샘터입니다.
‘약천’이라고 불릴 만큼 병에도 효력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식수로 쓰긴 어렵다고 하네요.

마지막 경치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초당 위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길을 보았습니다.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커다란 바위 돌에 ‘정석’이라고 새겨져 있네요.
원래는 다산이 자신의 성에서 가져와 ‘정(丁)’이라는 딱 한 글자만 새겼다고 합니다.
직접 새겼다고 하는 글씨가 어찌나 정갈한지, 역시 ‘조선의 다빈치’ 다운 암각 솜씨네요. 

다산의 도서관 겸 서재, 동암

다산초당을 지나 조금만 지나면 집필을 위한 2000여권의 책들이 있다던 동암이 나옵니다.

다산은 도서관이자 서재이기도 한 이곳에서 주로 머물며 집필했다고 합니다.

거주하고 생활하는 다산초당이나 서암과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은

이곳에 있을 때만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보정산방’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라고 하죠.

바로 옆의 또 다른 현판의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입니다.

차를 매개로 이루어졌다는 다산과 추사의 친분과 교류의 온기가 지금도 남아있는 듯합니다.

강진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천일각

동암을 지나 백련사로 올라가는 길이 꺾이는 곳에 이르면 순간 숲이 툭 트이면서 
그 아래 강진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절경 앞에는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끝의 천일각은 다산 때는 없던 건물입니다. 

우리도 시를 지어 애정을 고백하고 싶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다산초당이지만,
생각해보면 정조의 승하와 신유사화로 형 정약종을 잃고 유배 온 다산의 마음이 편하기만 했을 리가 없죠. 

천일각 끝에 서서 다산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다산은 아마도 아픈 마음을 천일각 자리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치유하지 않았을까요.

갑자기 다산초당을 성급히 떠나는 것이 조심스러워져 떠나기 전 툇마루에 잠시 앉아봅니다.
유배를 떠나야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그가 강진에서 시간을 보낸 덕분에 우리는 「목민심서」와 같은 명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은 유배의 세월도 허투루 쓰지 않은 다산에게 감사하단 말씀을 전하고도 싶네요.
다산이 있어서 다행이었고, 강진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