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조선의 도공에서 일본의 도조로,
이삼평
여기를 클릭해 내용을 입력하세요. 텍스터 에디터에서 글꼴을 선택하고, 텍스트 상자의 위치도 변경할 수 있습니다.
도잔신사
일본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규슈 사가현의 도잔신사(陶山神社, とうざんじんじゃ)로 정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엮는 연결고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 의미 있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 낯선 땅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의 도공 이삼평은 어떻게 일본에서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사가(佐賀,さが)현의 아리타(有田, ありた)에 올 때는 주로 아리타 역에서 내린다던데, 도잔신사는 한 정거장 전인 가미아리타(上有田,かみありた) 역이 더 가까운 듯하다. 기차 대신 차를 타고 내비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우리는 이곳이 맞는 건지 좁은 골목길 입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도잔신사 주차장이라는 표지판만 믿고 계속 들어가 보기로 한다. 골목길을 서서히 돌고 기찻길 아래 짧은 터널도 지난다. 차 하나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길 끝에서 나오던 차는 우리를 발견하곤 폭풍 후진을 해서 양보해준다. 끄덕끄덕 고맙다는 목례를 하고선 올라서자 도잔신사의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이곳이 신사임을 알려주듯 신사의 상징과도 같은 문인 도리이(鳥居, とりい)가 있다. 그런데 도리이가 하나가 아닌 두 개가 다른 시기에 세워진 듯 서로 다른 세월을 드러내고 거의 겹치듯 서있다. 두 개의 도리이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탑들까지 섞여 있는 모습이 처음에는 다소 산만하게도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과는 다소 달라서였던 것 같다. 내 머릿속에는 최소한의 것들로만 가지런히 정렬된 일본정원이 너무 가득했던 탓인 듯하다. 역시 단편적인 문화흡수의 부작용이다.
여러 탑들 사이로 도자기로 만든 여러 개의 설명비들도 함께 있다. 한글도 있어서 읽어보니 '아리타와 깊은 인연을 가진 한국의 국화, 무궁화 등의 꽃을 피워 신역'을 치장했다고 쓰여있다. 왠지 미더운 맘이 들어서 다른 곳에 있는 영어 설명문도 읽어 보니, 'Korea which Arita has close relation to'라고 그대로 옮겨져 있다.
잠시 의심한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도 일본 사람들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더구나 이삼평이 일본에서 강제로 끌고 온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애매하나마) 알리는 설명은 이곳 꼭대기에 세워진 이삼평비 앞에만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계단 바로 옆에는 신사에 의례 있는 '데미즈야(手水舍)'라고 부르는 손 씻는 '샘'이 있다. 신사의 주건물인 본전 바로 옆도 아니고 신사 입구부터 있는 것은 참배를 위해서라기보다 신사에 들어서는 것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라는 뜻처럼 여겨진다. 성당 입구에 놓인 성수와 같은 뜻일까? (하지만 올라가보니 여기도 본전 앞에 또 있더라)
데미즈야 옆에 동상이 하나 있길래 혹시 이삼평의 동상인가 했는데 20세기 초 지역 유지로 이삼평을 이곳에 모시는 일을 추진했던 후카가와 로쿠스케의 동상이라고 한다. 데미즈야에는 친절하게 그림으로 손 씻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신사에 '참배'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기에 그냥 확인만 한다. 데미즈야에 놓인 히샤쿠(ひしゃく)라 불리는 물주걱에 종종 입을 데고 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이 있다곤 하는데, 아마도 우리 네 약수터에서 하던 대로 그러는 것이겠지. 일본 신사에 와서 참배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과 기본적인 예는 갖춰야 할 것 같다.
계단 아래서 올려다보니 신사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서 가보는 첫 번째 신사이기는 했지만, 이곳의 신사는 (영화나 인터넷에서) 주로 보았던 도심의 신사와는 또 구조가 다른 듯하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도리이가 다시 나오는데 이번엔 아래 있는 돌로 올린 도라이와 달리 도자기로 세운 도리이다.
도자기 마을답게 도자기를 활용한 것인데 군데군데 깨지고 떨어져 나가고 갈라진 것을 봐서 도자기로 도리이를 세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닌가 보다. 아마도 아리타 사람들도 도자기 도리이를 올리면서 깨달았을 듯하다. '아하, 그래서 다들 돌이나 나무로만 도리이를 올리는구나’
계단을 다 오르니 바로 본전이 보인다. 이곳에도 참배하는 방법을 그림과 함께 상세하게 안내한 설명문이 있다. 하지만 역시 참배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아래 데미즈야에서 보았던 설명문처럼 일본어 설명만 있다. 대도시 신사에는 영문과 한글 설명도 있다고 하던데, 이곳에서는 외국인들에게까지 데미즈의 사용이나 참배를 기대하지는 않는 것일까.
아무래도 한국인으로서 참배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도 도잔신사에 이삼평만 모셔져 있다면 참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지역 번주였던 니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오진 왕도 모시고 있다. 오진 왕은 도잔신사가 1658년 처음 세워질 때부터 섬긴 대상이다.
결정적으로 본전 안에 걸린 일왕 즉위 30주년을 축하하는 배너를 보고서 내 마음이 얼었다. (이날은 첫날이라 아직 몰랐지만, 그 후 규슈 여행 내내 곳곳에서 이와 관련된 배너와 행사, 이벤트, 세일, 기념품들과 마주쳤다) 내년에 물러난다는 아키히토 일왕은 그래도 일본의 과거에 대해 가장 반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자신을 백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는 말까지 해서 일본 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배너에 '천황폐하'라고 적힌 것을 보고는 확 돌아서고 말았다. 여행하는 지역의 문화는 존중하는 게 맞지만, 역시 참배까지는 어렵겠다.
1917년 세워졌다는 '도조 이삼평 비'를 보고 싶었는데 본전이 있는 곳에서는 어떤 안내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1917년은 이삼평이 이곳 도잔신사에 모셔진 해다. 이미 일제가 한일합병을 하고 한국에 대한 가혹한 탄압정책을 밀던 시기였는데, 아리타 사람들은 오히려 이삼평의 이름을 일본에서 주었던 이름인 'Lee Sanpei'에서 조선에서의 본명인 'Yi Sam-Pyung'으로 복구하고 이삼평을 마을을 대표하는 산업을 일으킨 '도조'로서 이곳에 모셨다.
이번에 도잔신사를 찾게 된 계기이기도 했던 유홍준 교수 책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I 규슈>에서 이삼평비를 보기 위해서는 '도잔신사에서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좁은 숲길로 무작정 올라가 본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작은 술병이나 여우인형들이 놓인 작은 탑들이 간간이 보이는 좁은 오솔길이다. 누가 보아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통로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 유홍준 교수를 믿고) 숲길을 해쳐가 듯 조금 가보니 원래 이삼평비로 오르는 길인 듯한 넓은 길과 합류한다. 아마도 주차장에서 본전을 거치지 않고 이삼평비로 바로 오를 수 있는 듯한 길로 보인다. 신사를 거치지도 않고 이삼평비로 오를 수 있게 한 것을 보면 이삼평비를 꽤나 중요하게 여기는 듯해서 고맙기도 했다.
이삼평비가 있는 곳으로 오르니 꽤 긴 돌계단 끝 언덕 맨 꼭대기에 이삼평비가 제법 웅장하게 올려져있다. 산 꼭대기에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에는 제법 큰 크기다.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현충원'과 같은 웅장함과 비장미까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부담스러우셨는지 아니면 긴 계단이 부담스러우신지, 동행한 부모님은 '여기서 봤으면 됐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올라갈 엄두를 내지 않으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다 조금이라도 젊은 아내와 나는 끝까지 올라보기로 한다. 가까이서 보니 더 높고 웅장하게 느껴진다. 일본 규슈 사가현 아리타에 우뚝 솟아오른 조선의 도공에서 일본의 도조가 된 이삼평의 비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이삼평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오면서 일본의 도기가 자기로까지 발전하고 산업도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은 중국에서 많은 도자기를 수입하고 있었는데 17세기 중반에 명이 무너지고 청이 들어오면서 갑작스럽게 도자기 수출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때 중국 도자기를 대체하면서 급격하게 발전한 것이 일본의 도자기 산업이다.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 도자기 산업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다 우리가 잘라서 그랬다고는 할 수 없다. 조선에서는 도공들을 공인으로 천대했지만 일본의 번주들은 도공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온 도공을 사무라이와 같은 신분으로 높여 존중한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 아리타에서는 도공이 신이 된 샘이다. 우리는 앞선 기술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기술자들을 천대했고 앞선 기술로 만든 도자기를 충분히 활용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서 풍경을 돌아보기로 한다.
이삼평비가 높은 곳에 있는 만큼 이곳에서는 아리타의 곳곳이 속속들이 다 보였다. 아리타에는 아직도 도자기 장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도자기들을 만들고 있다. 멀리 '심천제자(深川製磁)'라는 간판이 보였다. '심천제'까지만 읽고 멈춰서 마지막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아버님께서 그 '자(磁)'가 '도자기'에서 '자'와 같은 한자라고 일러주신다. 일본 여행 내내 내 짧은 일본어는 한자에서 번번이 막히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님께서 일러주셨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삼평비를 보고 내려오면서는 발걸음과 마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한번 지났던 길, 한번 보았던 풍경이라 좀 더 편한 마음도 있고 익숙한 생각마저 든다. 아리타가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일본이 좀 더 가깝게도 느껴진다. 일본 첫 여행의 지점을 도잔신사로 정한 보람이 든다.
언제나 그렇듯, 한번 간 길도 다시 돌아갈 때는 늘 다르다. 올라갈 때 눈에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내려가면서 보인다. 처음 도착했을 때 무심히 넘겼던 기찻길로도 나가본다. 낮은 지대도 아니고 언덕 위에 놓인 기찻길이 생소하기도 한데, 아마도 느린 완행열차나 지나갈 것 같은 철도가 놓인 풍경이 정겹다.
건널목인데도 그 흔한 차단기조차 없이 조심하라는 안내를 글로 남겼을 뿐이다. 그 모습이 위험을 방치했다는 느낌보다는 철길과 기차가 마을 사람들의 삶에 녹아든 듯 익숙한 느낌이 든다.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한 몸과 같은 것이기에 기차는 위험이 아니라 그냥 풍경일 것만 같다. 시간만 많다면 이곳에 머물며 지나가는 느린 기차만 하루 종일 바라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고 싶었다. 한 지역의 여행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그렇다. 다시 아리타를 찾아올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때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나도 우리도 달라져 있겠지. 그 이유가 여행과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한 성숙때문이라면 더욱 좋겠다.